혼술, 그런 건 안하는 게 좋다. 버릇되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귀갓길에 반드시 한 잔은 마셔야 한다는 강렬한 유혹에 휩싸이고, 한 잔은 두 잔 되고 1차는 2차가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술이 없으면 입이 깔깔해서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 지경이 온다. 웰컴 투 알콜중독이다. 몸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고, 회복하는데는 고통과 인고의 시간이 소요된다. 애초에 혼자 마시는 술은 좋지 않다.
하루 14시간은 우습게 일하던 시절의 나는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다. 하루를 마치고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 아직 해야할 일은 남아있고, 일과 리프레싱을 동시에 하고싶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집근처 술집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거나 자료를 읽었다. 하지 마라. 후회하고 있다. 술을 마시면 초반에는 살짝 긴장이 풀리며 작업능률이 더 오르는 듯한 착각도 든다. 물론 거기서 한 두 잔 더 마시면 작업이고 뭐고 달리기 시작하는거다. 혼자서 장소를 옮겨 다니며 매일 3차까지 했다. 주말에는 휴일 기분을 내겠다고 술을 사들고 연구실로 출근했다. 그렇게 일년 정도 보내니 체중은 10키로가 늘고 알콜중독 초기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혼술을 끊었다. 그리고 몇 개월은 귀갓길 술집 골목을 지날 때마다 나 자신과 격한 싸움을 해야 했다. 지금은 벗어났고 그때 쪘던 살도 거의 다 뺐지만,
몸에 나쁜 건 정말 즐겁긴 하다. 여전히 혼자 홀짝홀짝 잔을 비우던 때의 기억은 아름답게 남아 있다. 음주로 인한 비용만 치를 필요가 없다면 계속 먹고 싶다. 요즘은 정말 가아끔씩, 혹은 여행을 가면 혼자 근처 술집을 찾는다. 추억하며 쓰는 혼술 가이드.
혼술 난이도
1단계 - 혼술이 로망이다. 한번쯤 분위기 좋은 곳에서 어른의 고뇌를 발산하고 싶다.
- (호텔) 바 : 바는 대부분 혼술러들에게 열려있다. 바텐더의 업무는 술만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원하는 손님에게는 대화를, 조용히 있고 싶어하는 손님은 조용히 챙겨주는 접객까지 포함된다. 한국이 아직 바 문화가 발달하지는 않아서 혼술 손님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라는 간판을 걸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혼술러에게 호의적인 편이다. 그래도 혼자 바에 가기 무섭다면, 비용은 좀 더 들지만 호텔 소재 바나 라운지를 추천한다.
- 주류 취급 카페: 아주 많지는 않지만, 간혹 있다. 미술관처럼 살짝 비일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곳에 자리한 구내 카페테리아에서 주류를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전망까지 좋다면 금상첨화. 도심 속의 여유같은 느낌으로 한가로운 오후를 만끽해보자.
- 수제햄버거/피자: 캐주얼하고 힙한 컨셉의 수제햄버거나 피자집에서 맥주 한 잔 곁들이는 건 자연스럽다.
2단계 - 난 가끔 혼술을 해
- 이자카야 : 적당한 규모의 다찌가 있는 이자까야. 너무 넓어도 너무 협소해도 혼술러가 자리를 잡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다. 도시 거주자라면 인근에 안주의 양과 가격이 혼술러에게 적당한 이자까야 두세 곳쯤은 있을 것이다.
- 야키니쿠 전문점: 이자까야와 같은 이유로 혼술하기 편하다. 야끼니꾸 전문점이라고 해도 2인 이상의 테이블 위주인 경우도 많은데, 요즘 생기는 1인화로집을 찾아볼 것.
- 와인 프랜차이즈: <오늘 와인 한잔> 같은 브랜드가 대표적이다. 잔술을 취급하고, 분위기도 적당하고, 안주의 가격이나 양도 적당하다. 브랜드 컨셉상 혼술러가 눈치 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웨이팅 걸리는 시간에 가면 조금 뻘쭘하니 한산한 시간대를 노리자.
- 오뎅바: 기본적으로 테이블이 아니라 바 형태라서 혼자가도 어색하지 않은 편이다. 물론 내 주위를 하하호호 떠드는 무리들이 감싸고 앉으면 다소 뻘쭘하다. 그럴땐 사장님/종업원과 대화를 나누면 한결 낫다. 2,3차로 주로 오는 가게 특성상 늦게까지 영업하는 것도 장점이다
...가 아니라 일찍일찍 집에 들어가도록 하자. - 스몰비어: 감소세이기는 하지만 한때 유행했던 스몰비어들이 아직 남아있다. 편하게 들어가서 맥주와 가벼운 튀김 안주를 먹기 좋다.
3단계 - 혼술이 별거냐
- 실내포차: 여기부터는 힙한 혼술러가 아니라 찌든 생활인같은 느낌이다. 동네 구석의 허름한 가게들이지만 의외로 음식솜씨가 상당한 이모님들이 계시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는 다른 술집들도 죄다 문닫은 새벽, 인생 김치찌개를 동네 실내 포차에서 만났다. 처음 혼자 디밀고 들어갈때는 조금 쑥스럽지만 대개는 친근하게 대해주신다. 불친절한 곳은 안 가면 그만.
- 국밥집/백반집: 개인적으로는 이게 찐이다. 점심식사의 반주라면 더욱 용기가 필요하다. 새파란 여자가 혼자 밥먹으며 소주 한 병 달라고 외치려면 혹 나의 사회적 체면과 위신이 손상되는 건 아닌지 자기검열을 통과해야 한다.
- 고깃집: 혼밥의 최고난이도가 고깃집인 것과 마찬가지다. 나도 이건 안해봤다. 마지막 선이랄까...
혼술 TIP
팁이랄건 아니지만 혼자 술마시고 다니면서 생각한 것들.
- 나는 손님이고, 손님은 돈 내는 사람이다. 내가 소심해지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특히 밥이 아니라 술장사는 혼자 온 손님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는다.
- 한때 혼술이 트렌드라는 말이 돌았지만, 개뿔. 혼자 술마시러 오는 손님들은 여전히 극히 드물다. 자주가던 동네 바에서는 내가 그 가게의 단 둘 뿐인 혼술 손님 중의 한 명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포함 둘 다 여자였다.
- 혼술 손님이 드물다는 건, 그만큼 기억에 잘 남는다는 의미이다. 대체로 술집 사장님들이 손님을 잘 기억하시는 것 같기는 한데, 진짜 수개월 전, 1년 전 한 번 갔던 곳에서도 지난번에(도) 혼자 오시지 않았냐고 알아본다. 심지어 굉장히 드문드문 갔는데 방문 횟수까지 기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단골되면 서비스도 잘 주고, 가끔 양이 많은 안주는 부탁드리면 1/2인분만 해주시기도 한다. 그런 걸 좋아한다면 문제될 게 없지만,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 버릇되면 정말 안좋다. 술은 되도록 기분 좋을 때,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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